본당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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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성당

    본당소개

    천주교 대구대교구 원평성당 (구미)

    소속 대구대교구 제5대리구 소속 본당
    소속지 (39303) 경상북도 구미시 원남로 120 (원평동)
    설립 1956년 12월 30일
    주보성인 성 베네딕토
    관할구역 송정동, 원평동, 선주 원남동 일부(구 남통동), 기타 구역 외
    교세 - 2022년 말 기준 1,509세대 / 7구역 / 30개반
    - 총 신자수 3,263명 (관할구역 인구 약 10%)

    주보성인 | 성베네딕토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베네딕토는 누르시아의 명망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어,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유모가 같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그 당시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베네딕토는 수사학 등 학문을 배우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혼란스럽고 타락한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베네딕토는 유모와 함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어느 도시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 유모는 밀가루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네 사람에게 체를 빌렸는데 잘못 놓아 둔 탓에 떨어져 부셔지고 말았다.
    유모는 당황하여 아주통곡하였는데, 신앙심 깊은 베네딕토가 기도를 하자 체가 원상복구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베네딕토의 능력을 경이로워하여 성당 문 앞에 걸어두었는데,베네딕토는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무도 모르게 산 속으로 피하였다.

    베네딕토는 로마누스 등 선배 독수자의 도움를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바구니에 빵을 담아 보내주는 간접적인 도움이었으며, 처음에는 혼자서 동굴에서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베네딕토의 수도생활을 방해하는 악마의 유혹이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베네딕토는 끝내 이를 이겨냈다. 베네딕토 전기에서는 이때 악마가 성 베네딕토에게 치를 떨며 "너는 베네딕토(축복받은 자)가 아니라 말레딕토(저주받은 자)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전한다.

    대단한 명망을 얻은 베네딕토는 어느 수도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매우 느슨하게 살아왔던 수도원과는 다르게 베네딕토한 엄격한 규율로 수사들을 지도하자, 수사들은 베네딕토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베네딕토가 마실 포도주에 독약을 타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베네딕토에게 포도주가 건네어지고, 베네딕토가 음용 전에 축복하자 포도주잔이 돌 맞은 유리창처럼 깨어졌다.

    그 후 베네딕토는 그 수도원에서 나와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토는 기존의 수도원의 규율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새로운 규율을 만들고 그의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이후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많아지면서 베네딕토 규칙서는 수도자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베네딕토의 이러한 업적 때문에 사람들은 베네딕토를 일컬어 '서방 수도승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국에는 독일 오틸리아 베네딕토회와 이탈리아 올리베따노 베네딕토회가 진출해 있다. 칠곡군, 대구광역시, 부산 광역시, 서울특별시 등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고, 대구와 창원[4], 부산[5]에 베네딕토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
    한국에서는 종종 '베네딕도', 또는 한문 음역인 '분도(芬道)'라고도 불린다. 성공회에서는 '베네딕트'라 한다. 가톨릭 계열의 '분도출판사', '성분도병원' 등은 다 베네딕토 성인의 이름을 딴 것.

    역사 | 구미 가톨릭 교회의 태동

      01. 박해시대와 영남지역 천주교인

      1800~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신자들이 전국 산골로 숨어들었는데, 이들이 모여서 살게 된 촌락이 이른바 ‘신자촌’이다.
      이런 신자촌이 영남에만 7곳이 있었다고 한다. 1815년에 있었던 을해박해(乙亥迫害) 이후로 영남의 신자촌은 청송, 진보, 상주 등 48개에 이르렀다.문경새재와 화령을 거쳐 남하한 신자들이 또 신자촌을 이루어, 1827년에는 대구를 포함하여 모두 68개의 신자촌이 영남에 자리 잡게 되었다.이때 상주에서 대구 사이의 길목에 터를 잡은 곳이 여진(余津)이다. 이곳이 낙동강 옆의 옛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이다. 여진공소는 1866년 병인년(丙寅年)에 이르러 신자가 96명까지 늘어났다.

      02. 송림공소

      김명양(金明陽, 실학자로 낙향한 일선인)은 당시 금릉군 남면 부황동 등골로 이주하여 남만억에게 신앙을 전하였고, 남만억은 1894년경 다시 고아면 송림동 권치하에게 교리를 전하여 영세시켰다. 여진에서 떠나간 신자들의 신앙의 불씨가 송림의 공소를 이룬 것이다.
      1906년에는 선산군 고아면 송림동 102번지의 목조 기와집을 구입하여 공소로 사용했고, 1933년에는 송림동 210번지에 새로 공소를 마련하는 등 세 차례나 옮기다가 1967년 송림동 476번지에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03. 구미공소

      송림공소를 세운 권치하의 셋째 아들 권성중은 1930년 구미로 이주해 살게 되었고, 1935년경에는 이례동에 살던 권익중(권성중의 중형)이 구미로 이주해 옴으로써 형제가 권익중의 집에서 참례를 보았다. 1920년경 송림에서 영세한 박유리안나의 아들 이재원이 1940년경에 이사를 오고 또 같은 때 권익중의 질녀 권우시아(김종봉의 모)가 왜관에서 이사를 옴으로써 네 집이 되었다. 이렇게 차츰 신자가 늘어나 1948년에는 구미공소로 승격되었고, 1956년 12월 30일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79년 9월 26일 치명복자 축일에 구미본당이라 통칭하던 구 본당을 원평본당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04. 본당현황

      현재 3,263명의 신자가 소속되어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수녀원이 있으며, 아포공소(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국사리141-3번지[국사길 62-6])가 원평성당 소속이며 천주교 아포묘지를 관리 운영하고 있다. 또한 교육기관으로 대구대 교구가 인보성체 수녀회에 위탁 운영하고 있는 분도유치원이 위치하고 있다.

      05. 본당의 분가

      구미가 공업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신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1978년에 신평동 54번지[야은로45길 13]에 대지 3,762㎡를 매입하여 건평 405.9㎡의 새 성당을 건축하여 1979년 9월 치명복자 축일에 구미본당을 분리, 신평본당을 세웠다.
      형곡본당은 1990년 2월 11일 형곡동 133번지에 새 성당을 착공하여 1990년 12월 18일 준공, 1990년 12월 23일 원평본당에서 분리되어 그 축성을 보게 되었다.또한 도량동 지역에 대규모 주거지역이 들어서면서 1996년 6월 19일에서 8월 13일 사이 교구청에서 성당부지 4,181㎡를 매입하였으며 그해 1996년 8월 30일에 원평성당에서 분가하여 도량성당을 설립하였다.
  • 주소. 경북 구미시 원남로 120 (원평동) Tel. (054)452-7623 |Fax. (054)452-7624
  • 주임신부:박철(요셉) |보좌신부:이찬규(세례자 요한) |수녀회:인보성체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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